시조소개




시조 신숭겸申崇謙

( ? ~ 927, 신라말~고려태조 10년)


지도

우리 평산 신씨(平山申氏)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고려 태조 10년, 서기 927년)이시다. 신숭겸 시조는 광해주(지금의 춘천)사람으로 초명은 능산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그분은 본래 전라도 곡성(곡성현 목사동면 구룡리 현,용산재)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춘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그 휘하에 들어갔다.

공(公)은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장대(長大)하고 천성이 용맹스러웠으며 신령(神靈)한 자품(資稟)과 기민한 지략(智略)에다가 활 쏘는 재주가 뛰어나 백발백중(百發百中)하였다. 참으로 장수다운 인재(人材)였던 그분은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워 마군 장군에 올랐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의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자신은 미륵불(彌勒佛), 두 아들은 보살(菩薩: 靑光菩薩·神光菩薩)이라고 칭하는 등, 백성을 괴롭히고 많은 신하를 희생시키며 호탕방일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무고한 많은 양민들과 신료들을 철퇴로 쳐죽이며, 처자를 불로 지져 죽이는 등 학정이 계속되자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모의하여 고려 태조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개국원훈 대장군에 올랐다.(918년) 신씨 성은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홍씨, 복씨 성도 왕건에게서 받았다.

고려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이 된 그분은 다른 공신들과 함께 고려의 국력신장과 민족통일 작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전장에서 전사하고 만다.

고려태조 10년(서기 927년) 10월,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경상 북부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 불현듯 회군하여 영천을 가로질러 경주를 침공한다. 이때 신라왕(제55대 경애왕)은 종친과 신료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나가서 놀이하다가 문득 적병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모두 함몰되었으며, 이에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경순왕)를 왕으로 앉혔다.

견훤의 경주 침략 소식을 들은 왕건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며 제사하게 하고서 직접 정예한 기병 5천을 친히 거느리고 군대를 통솔하여 경주로 향한다. 하지만 그때 견훤은 이미 경주에서 퇴각하여 돌아가고 있었다. 왕건은 별수 없이 공산무주(대구의 팔공산)에 진을 쳤고 이는 곧 지금의 동화사(桐華寺)이며, 여기서 견훤을 맞아 기다렸는데 견훤이 반드시 이 길을 지나 회군을 할 것을 간파하였다. 그 이유는 동화사와 파계사가 모두 견훤 세력과 깊이 밀착되어 있는 진표율종(眞表律宗) 즉 백제계 법상종에 속한 사찰로 신라 영토내의 견훤 세력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이에 고려군은 공산 동수에 이르러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견훤을 갑자기 들이쳐 격파하니 처음에는 견훤군이 갈팡질팡하였으나 워낙 수가 많은 후백제군은 점차 수습되면서 형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여 도리어 왕건군이 포위 속에 들게 되고 형세가 몹시 위급하였다.

병력이 열세했던 고려군은 점점 대패하였으며 태조와 장수들은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허사였다. 이 전투에서 가까스로 왕건이 목숨을 보전한 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신숭겸의 지략과 충심 덕분이었다. 이곳의 마을 이름이 지묘동(智妙洞)인 것도 신숭겸 장군의 지혜가 교묘했다는 데서 연유하고 있다.

대장(大將)이던 신숭겸의 얼굴이 태조와 흡사하였는데 그 전쟁의 형세가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닫게 되자 신숭겸께서 몸으로써 대신 죽음을 할 것을 자청하면서 태조의 수레(어거, 御車)에 갈아타고 태조와 갑옷을 바꿔 입고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견훤의 군사는 신숭겸을 태조로 여기고 그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달아나니 포위했던 군사가 조금 풀리어 태조는 겨우 단신(單身)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공산전투가 치러졌던 팔공산 일대에는 신숭겸과 왕건의 관련된 전설과 지명이 많이 관련되어 있다. 팔공산도 공산 이였던 것을 고려 태조 왕건이 동수대전시(桐藪大戰時)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 전이갑(全以甲) 전의갑(全義甲) 등 팔장(八將)의 순사(殉死)로 인하여 팔공산(八公山)이라 했다는 일설이 있다.

아! 이때에 신숭겸께서 죽지 않았더라면 포위는 풀리지 않았을 것이요. 포위가 풀리지 않았더라면 싸움도 이기지 못하였기에 저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500년의 왕업(王業)을 이어받게 한 것은 신숭겸의 충절의 공(功)이 여기 있었기 때문이지 아니한가!

위기를 모면한 태조는 태조가 본진에 돌아와서 곧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어졌으므로 이를 분간할 수 없었더니 대장 유금필 등이 말하기를 『신장군의 왼발 아래에 사마귀의 무늬가 있었는데 북두칠성과 같았습니다』하는지라 이 근거로 과연 찾아내었다. 이에 목공에게 명하여 머리와 얼굴을 새겨 만들게 하니 마치 생시의 모습과 같았다. 조복을 갖추어 자리에 앉게 하여 태조가 친히 제례를 행하고 통곡하였으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장지(葬地)를 도선대사가 태조 왕건자신의 묘터로 정한 곳인 광해주 소양강 비방동(現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예장(禮葬)하게 하고, 태조묘정(太祖廟庭)에 배향(配享)하였으며, 곡성(谷城)의 덕양사(德陽祠), 대구(大丘)의 표충사(表忠祠), 춘천(春川)의 도포서원(道浦書院), 평산(平山)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 제향(祭享)하였다. 또한 돌아가신 그 자리에 단(순절단, 殉節壇)을 모으고 절(지묘사, 智妙寺)를 지어 장절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충렬도

충렬도

공산무주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여 많은 뛰어난 장수들을 읽게 되는데, 특히 개국공신 신숭겸의 죽음은 왕건에게 커다란 패배감을 안겨주었다. 태조왕건은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벽상호기위 태사개국공 상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 지절지정공신(壁上虎騎衛 太師 開國公 三重大匡 毅景翊戴 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추봉하고 장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태조는 장절공의 아들 보장에게 원윤으로 삼고 지묘사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었다.

태조가 매양 팔관회(고려 때 불교에서 유래한 국가 제전의 하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교환(交歡)할 적마다 유독 전사(戰死)한 공신들의 반열에 있지 않는 것을 측은히 여기어 신숭겸과 김락의 상(像)을 짚으로 묶어만들게 하여 조복을 입혀서 반열에 따라서 앉게 하고 임금이 더불어 함께 즐기면서 술과 음식을 내리기를 명하니 술이 문득 닳아 마르고 가상(假像 : 짚으로 만든 상)이 일어나서 춤을 추는 것이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이로부터는 연회를 여는 행사에는 항상 이들의 자리를 만들어 두도록 하였다.

이러한 행사가 이어져 공(公)께서 돌아 가신지 약 200년 후인 1120년(예종 15)에는 예종대왕이 서경(西京: 평양)에 행차하여 <팔관회>가 열렸을 때 이였다. 가상(假像) 둘이 관복과 무장(武裝)을 갖추어 말을 타고 뜰을 뛰어 달리며 다녔다. 임금이 이상히 여겨 이를 물으니, 좌우에서 다음과 같이 그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 두 분은 신숭겸과 김락으로,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신성대왕(神聖大王 : 고려 태조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공신이다. 그래서 그 공을 높이고자 태조 때부터 팔관회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다. 태조는 그 자리에 두 공신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풀로 만든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랬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임금(예종)이 초연히 감개(感慨)하여 두 신하의 후손을 물으며 경, 유비, 명부(5, 6, 7세 조고:祖考)에게 벼슬과 상(하사품)을 내렸고, 이어서 한시(漢詩)와 함께 <도이장가>를 지어 신숭겸과 김낙(金樂)의 공을 추도하였다.

오호! 사람이 누가 살기를 싫어하고 죽기를 좋아하는가! 나라가 위태로울 때 죽음을 두려워 않고 목숨을 바쳐 구하는이가 이 새상에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생각컨대 오직 장절공이야말로 지략(智略)으로써 매사를 잘 대응하였으며, 충의(忠義)로써 그 임금을 받들고 용맹으로써 그 몸을 잃었으니, 장절공의 공훈은 태산이 우뚝하되 이보다 높지 못하고, 장절공의 이름은 천추에 뚜렷하여 사라질 수 없으므로 가위(可謂) 만고(萬古)에 뛰어난 열장부(烈丈夫)라 할 것이다. 공이 일찍 고려의 건국을 돕고 또 전란의 위기에서 위왕대사(爲王代死:왕을 위해 대신죽음)함으로써, 통일민족국가의 기반을 다졌고,국가안보의식과 인간의 도리를 일깨운 위대한 공훈과 숭고한 절의는 살신성인(殺身成仁)한지 천여년의 세월이 흘러 간 오늘에도, 우리의 국가관, 역사의식, 도덕관념, 문화정서의 정립(定立)에 보배로운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우리 시조의 충훈(忠勳)과 장절(壯節)이 저와 같으니 이를 널리 알리고 우리 가슴에 새기면, 어찌 이 나라 백성이 되어 불충(不忠)한 자가 부끄럽지 않겠으며 자손이 되어 불효자가 깨우치지 않겠는가?


장절공의 묘소(춘천)

장절공의 묘소



장절공의 묘소에는 봉분이 셋인데 장절공의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예장하면서 혹시 엿보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봉분을 셋으로 만들었다고도 하고, 또는 부인을 합장한 것이라고도 하나 어느 봉분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제향은 중앙의 봉분앞에서 행하고 있다.

묘소는 도굴꾼들이 수 차례 도굴을 시도하였으나 그 때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모두 잡혔다고 하고, 일제시대에는 일본장교가 말을 타고 묘소 앞을 지나자 말발굽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내려서 분향 후 지나갔다고 한다.

장절공 신숭겸의 묘역은 춘천 박사마을로 유명한 서면에 있으며 풍수지리학의 묘터로도 유명하다. 이 묘역은 우리나라 4대 명당지(明堂地)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으로 울창한 소나무가 좌우에 도열하고 있는 듯 있으며 묘역을 비롯 영정각, 신도비각, 기념관,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한다.

가는 길은 경춘국도를 달려 강촌, 등선폭포를 차례로 지나면 의암대교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건너기전 좌측 길로 접어들어야 하는데, 실제 도로는 우측으로 빠져 의암대교 밑을 지나간다. 여기서 길을 놓치고 의암대교, 의암터널을 지나면 되돌아와야 한다. 의암대교 밑을 지나 북한강을 끼고 잠깐 달리면 우측으로 의암댐이 나온다. 의암댐을 건너지 말고 계속 직진할 것. 의암댐부터 이어지는 길이 403번 지방도로로 환상의 드라이브코스이다.
의암호 건너편에서 봉의산과 춘천 시가지를 볼 수 있어 이 고장이 물의 고장이며 호반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한다. 호수의 여기저기에는 울긋불긋한 낚시꾼들의 좌대와 낙엽처럼 떠있는 재첩잡이 나룻배가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져 있다.
고인돌, 적석총 등 청동기 시대 문화유적의 보고인 중도를 바라보며 이 도로를 5분쯤 더 달리면 길 좌측으로 성어촌이란 식당이 있고 식당 옆으로 현암교라는 작은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지나자마자 묘소입구간판을 따라 좌회전하여 실개천을 끼고 잠시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울창한 송림안에 신숭겸 묘역(강원도 지정기념물 21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