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종중
HOME   >   파종중   >   파종중




용산단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8-20 16:06:23       조회수 : 2512 파일 :

龍山壇

전남 곡성(谷城)읍내에서 남으로 50리 가량인 비례산(飛來山)아래 대황강(大荒江)위쪽에 구룡리(九龍里가 있으니 여기가 곧 시조 고려태사 장절 신공 휘 숭겸(高麗太師壯節申公諱崇謙)이 태어난 곳이다.

이곳에는 여기지기에 장절공의 많은 유적들이 흩어져 있는데 독서당 유지(讀書堂遺址), 신공정(申公井), 사대(射臺)는 비래산 도장동(道藏洞)에 있어 이 산을 일명 신유봉(申遊峰)이라 부르며, 치마대(馳馬臺), 철갑암(鐵甲岩), 장군천(將軍泉)은 화장산(華藏山)에 있다. 또 장군등(將軍嶝), 계마석(繫馬石), 용소용탄(龍沼龍灘)의 목욕처(沐浴處)등이 있는데 이곳 노인들 사이에 오래도록 알려져 전해온 유적들이다.

일찍이 고종(高宗) 무진년 1868년에 후손 명희(命熙)가 후손 보국 헌()과 판서 석희(錫禧)에게 협의하여 종계를 만들어 그 자금으로 산림과 전답을 매입하고 초목(樵牧)을 금지케하여 이를 수호해 오다가 30년 후인 고종 정유년 1897년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이어 순종(純宗)후 기사년 1929년에 이르러 사론(士論)에 의하여 설단(設壇)하고 이곳 고을 이름을 따라 용산단(龍山壇)이라 했으며, 가을 9월 중정일(仲丁日)에 제사를 거행하고 있다.

서기 1973년 후손 현모(鉉模)등이 장군단(將軍壇)에 입비(立碑)하고 태안사 입구에 영적비(靈蹟碑)를 세웠으며 1960년에 후손 봉식(鳳湜)등이 주축이 되어 용산재(龍山齋)와 구룡문(九龍門)을 단소(壇所) 아래 창건하고 방명비(芳名碑)를 세웠다.

1981년 전남도 화수회 세풍(世豊)회장과 형철(亨澈)총무 등의 9년 동안 성력(誠力)으로 용산단과 덕양서원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 제56호로 지정을 받았으며 1987년 상학(相學)도유사가 관리사를 이축했으며, 문화재 지정 이후 도비 4천만원으로 용산재와 덕양사우에 각각 2천만원으로 개와(改瓦)했다. 이어 1990년 형철(亨澈)이 도유사에 취임 군비보조 5천만원으로 구룡문을 중건하고 대종중 보조 1천만원으로 부지용 토지 2필지를 매입 했으며 구비(舊碑)를 입각(入閣)시켜 쌍립(雙立)케하고 비각을 보수단청 한 뒤 계마석 주위을 보수하고 도로 3곳에 안내 표지석을 건립하였다.

이어 호균(湖均)도유사 후임으로 1998년 취임한 두천(斗千,斗澈)도유사가 용산단 성역화 사업을 추진, 대종중과 전국의 종원을 설유하는 한편 곡성군과 전남도, 문화재청등 관계당국의 협조를 이끌어내 거금 30여억원으로 부지 1천여평을 매입, 경내를 확장하고 용산재(龍山齋)를 비롯, ·서재(東西齋), 전사청(典祀廳), 내삼문(內三門), 관리사(管理舍), 화장실(化粧室), 협문(夾門) 등을 전면 신축, 용산단의 면모를 일신시키는 대역사를 이룩했다. 이 때 곡성군 고현석(高玄錫)군수와 후손 문화관광부 낙균(樂均)장관, 상균(相均), 호균(湖均), 창섭(昌燮), 인철(仁澈)총무의 노력이 지대하였으며 특히 후손 정남(正南)이 부지용 전답 700여평을 매증, 성역화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2004년에는 경내에 시조 동상을 건립하고 관상수 500주를 식재하였다. 유식(有植) 도유사가 취임 외삼문과 전후 담장을 축조하고 진입로를 확포장하였으며 각급 토지와 건물을 정비 관리했다. 뒤 이어 2007년 현덕(鉉德)도유사가 취임, 조형래(趙亨來) 군수와 상규(相圭) 광주지검 검사장, 현대(鉉大)충무와 협력하여 진입로 확포장공사를 마무리하고 용산재 등 전체 건물을 단청하였으며 외삼문 주변에 화단을 조성하고 주차장 확장 성토(成土)공사를 완료함으로서, 경내가 더욱 환연(歡然)해졌다.

 

- 소재지 :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신숭겸로 226(구룡리 180)

-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 56호

- 향 사 : 매년 9월 중정일(仲丁日)

 

리스트

덕양서원
표충사와 영각유허비